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우리들이 아직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들에게, 괴로움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진실이 아니다." 무상고 무하라고 하듯이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거라 "고정된 실제가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실제라고 여기며 그것으로 고통받고 살아왔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실제화시켜서 고통받을 만한 그런 실제인 것이 아니다. 연기적인 인연 가합이고 그래서 공한 것이다"라는 얘기를 한 거예요.
색과 공의 관계
그럼 우리들이 일반 중생들에게 환기가 됩니다. 처음에는 이게 다 실제라고 여기면서 "나와 내 것, 아와 아소라고" 하는 나도 실제고 내 것도 실제지라고 집착과 욕망과 이런 것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오다가 이 법문을 듣고서는 "아, 색이 공과 다르지 않구나. 그리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구나" 이 사실을 공부를 하고서는, "아,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붙잡고 집착하며 살아왔던 것이 아, 이걸 그럴 필요가 없었구나"라는 사실을 조금씩 환기를 하면서 이제 삶의 방향성이 좀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실제라고 여기면서, 집착하다가 하면서 살아오던 삶이 잠깐 이제 멈추면서, 아, 이것이 정말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곳의 진짜가 뭐지? 실제가 뭐지? 그것을 이제 살펴보고 시작하면서 조금씩 이제 색불이공을 깨달으면서 집착을 놓아버리게 돼요. 그래서, 아, 이 세상 모든 것이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니야 하고, 이제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그렇게 색불이공을 통해서 집착을 내려놓는 삶을 살다가 자칫 잘못하면 아, 불교는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공한 거니까, 그 어떤 것도 집착할 필요가 없고, 그 어떤 것도 실제가 아니라네. 그러니까, 그 어떤 것도 내가 열심히 살 필요도 없는 거 아니겠어? 공에 빠지는 거죠. 그래서, 열심히 살 필요도 없고, 인생을 뭐,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 필요도 없겠구나 하고 좀 게을러지고, 현실을 좀 무시하고 이러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단 말이죠.
그래서 그런 사람을 위해서, 공에 사로잡히는 사람을 위해서, 공불이색을 설하는 걸 통해서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 이 공이라는 진실은 이 현실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집착은 놓아야 되겠지만, 머무는 법 없이 마음을 내라고 하듯이 집착하지 않아야 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집착한 법 없이 마음을 내고 사는 것이다. 현실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문의 부처님께서도 끊임없이 설하신 것이 게으르지 말아라는 말씀을 정진하라는 말씀을 아주 무수히 설하셨거든요. 그래서 이처럼 우리들에게 이제 범부중생들에게 색불이공 공불이색을 설하는 걸 통해서, 아, 이 현실세계가 실제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무집착을 실천해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아, 집착 다 버리고 돈도 다 버리고 열심히 살 필요도 없구나라고 치우친 공에 치우친 사람을 위해서 다시 공직시 공불이색을 설하는 것을 통해서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머무는 법 없이 마음을 낼 수 있도록 집착하는 법 없이, 그러나 현실을 생생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렇게 우리를 이끌어주는 법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들이 일반 불교계에서 우리가 불교라고 말하는 많은 곳에서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이 아마도 여기까지였을 거란 말이죠. 이게 불교의 핵심이었던 거예요. '아, 내가 이제 집착하지 말아야 되겠구나.' '아, 머무는 법 없이 마음을 내야 되겠구나.' 이렇게 사는 거죠. 여기까지가 이제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온 불교계 안에서 공부해 왔던 것들이에요. 그런데 색불이공, 공불이색 내가 충분히 사유해 보니까 맞는 것 같아. 그래서 집착도 많이 내려놔줬고, 삶이 좀 편안해지긴 했을 수 있어요.
그런데 뭔가 여전히 미진함이 남아요. 내가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거죠. 교리적으로는 이게 이해가 되고, '아, 이럴 수 있구나.' 이게 충분히 이해가 되었어요.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내가 없느냐. 내가 태어난 바가 없고 죽는 바가 없느냐. 불생불멸이냐. 이것이 정말 확인되느냐. 이 공이라는 것이 진짜 내 삶으로서 나의 삶의 체험으로서 매 순간 확인되고 있느냐. 정말 내가 내일모레 죽더라도 상관이 없겠느냐. 정말 불생불멸 맞느냐.
법문의 단계별 진행
이렇게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거기까지는 제가 아직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석가문의 부처님께서 처음에 일반 중생들에게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단계별 법문을 설하셨어요.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서. 근기가 아직 높지 않은 사람에겐 낮은 수준의 불교를 설하신 거죠.
그래서 처음에 시론, 계론, 생천론이라고 해서 보시하고 착한 일을 하며 살고 계율을 지키는 삶을 살고 그렇게 되면 선인선과 악인악으로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곳에 태어나고 나쁜 업을 지으면 나쁜 곳에 태어난다. 이런 어떤 쉬운 단계 법문을 중생들에게 일반 제가 신도님들에게 설하셨어요.
그런데 이제 이 시론, 계론, 생천론의 수준을 넘어서는 불자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제 제육의 과환, 출리의 공덕 이래서 모든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환란을 불러온다. 그래서 출리의 공덕, 이 출세간 진짜 법이 무엇인지 열반과 해탈이 무엇인지 이 세간에서 완전히 해탈하는 것을 설하시고 그렇게 이제 단계별로 근기가 상승한 사람을 위해서 사성제를 통해 괴로움과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설하셨거든요.
그것처럼 시론, 계론, 생천론의 수준에서는 또 제육의 과환 이 정도의 수준에서는 좀 낮은 수준의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서 그들의 관점에서 설명하신 거예요. 그러다가 이제 나중에 조금 더 높은 수준의 가르침을 설하신 것처럼 반야심경도 이제 그런 어떤 방향인 것이죠.
그래서 색불이공이라고 법을 설해주고 거기 또 이 공에 치우친 사람을 위해서 공불이색이라고 해주는 성까지가 이제 우리가 공부해 왔던 방향성이었어요. 그런데 부처님도 그러셨던 것처럼 이제 어느 정도 근기가 성숙해지면 그 사람을 깨어나게 했단 말이죠. 열반해탈로 이끄셨단 말이죠. 부처님과 똑같은 한 분의 아라한이 되도록 이끄셨단 말이죠. 그래서 이제 지금까지는 우리가 어떤 중생들의 입장에서 부처님께서 시론, 계론, 생천론을 말씀하신 것처럼 조금 쉬운 단계의 가르침을 배워왔다면 이것을 가지고 완전한 해탈이라고 할 수 없단 말이죠.
완전히 우리의 괴로움이 해결된 게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이제 부처님께서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해야 되는 거죠. 이 대승불교에서 또 선불교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 정말 사람을 깨어나게 해주는 그 체험적 진실 그것을 설하는 단계가 어찌 보면 색 즉시공, 공 즉시색이라는 이 부분입니다.
그중에도 우리가 많이 들어본 게 이 네 구절 가운데 제일 많이 들어본 게 색 즉시공이죠. 색 즉시공 제일 많이 들어봤을 거예요. 또 영화의 제목도 색 즉시공 이러잖아요. 이 네 구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색 즉시공인 거예요. 색이 공과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색이 공과 다르지 않아 이러면 이제 어느 정도 머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색이 즉 곧바로, 여지없이, 몰록, 문득 바로 여기서 곧장 공이라는 것이죠. 색이 다르지 않은 게 아니라 색이 그대로 공이라는 거예요. 이 지점이 이제 우리가 한 번 넘어서야 하는 고비라고도 할 수 있어요. 선 불교에서 간화선에서 화두를 던져주고 화두가 한 번 딱 타파되는 어떤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이제 조금 설명을 해보면요. 이렇게 말하거든요. 선 불교에서는요. 선의 용어로 설명을 해보면 색 즉시공이라는 것은 색이 여지없이 곧장 몰록 문득 공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곧바로 여기서 곧장 체험적으로 와닿는다는 거거든요. 죽이라는 말은 틈이 없다는 소리예요. 간격이 없다. 그 앞에는 불이 공이면 색은 공과 다르지 않으니까 아 같지는 않지만 이게 다르지 않은 거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는 그 틈이 있단 말이에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 이거 공과 다르지 않네. 이게 용납이 됐단 말이죠. 그 앞에서는. 그런데 여기서는 그게 용납이 되지 않아요. 틈이 없이 곧장 색이 곧장 즉시공이 돼야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선 불교에서 우리가 견성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공이라는 말이 다르게 말하면 초기 불교에서 말한 해탈과 열반이 다르지 않은 이야기예요. 그런데 공이라는 진실을 대승불교에서나 혹은 특히 선불교에서는 성품이라고 자기의 본래면목이라고 이 본래면목이라는 말은 뭐예요. 뭔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참나라는 뭔가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당신의 본래, 본질이 뭐냐. 본래의 자기의 면목이 뭐냐 이거거든요. 진짜 자기가 누구냐 이거예요.
진짜 나의 진실이 뭐냐. 내가 이렇게 괴로움, 가짜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는데 가짜 괴로움에 허덕이지 않는다면 가짜 괴로움에 허덕이기 이전 인연 따라 화합된 이 모든 물질들을 실제라고 착각하기 이전 그 이전에 본래 너는 누구였느냐. 그거를 묻는 거거든요. 진짜 진실이 무엇이냐 이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을 이름에서 불교에서 모든 말은 불교는 중도적인 언어로, 법을 설하잖아요. 중도라는 말은 연기라는 말과 같고요. 중도와 연기라는 말은 가명이라는 말과 같아요. 이게 중간 사상에서 나오는데 언어로 표현된 모든 것은 가명입니다. 가짜 이름이란 말이죠. 가짜 명칭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가명으로서 연기의 중도를 설하기 위해서 대승불교, 선불교에서는 가짜 명칭으로 본래면목, 주인공, 불성, 자성, 본성, 성품. 참나, 굳이 오염된 용어로 설명한다면, 참나, 지나라는 말까지 갈 수 있을 만한 그런 용어로써 가짜 이름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것을 성품이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그 공이라는 진실을. 그래서 견성하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색, 즉 시공을 깨닫게 되면 색이 곧장 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견성한다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자기 성품을 드디어 비로소 보게 된다는 거예요. 곧장, 여기서 몰록, 그걸 도노 견성이라고 부르잖아요. 도노, 몰록 깨닫는다.
그래서 견성, 자기 성품을 보게 된다 이 소리거든요. 그래서 이 색, 즉 시공이라는 이 단계를 넘어서는 게 우리 공부의 선에서 말하는 견성하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그래서 선사 스님들께서는 색이 곧장 공이라는 사실을 비추기 위해서 여러분이 이제 스승을 찾아갔어요. 스승에게 도가 무엇입니까? 저의 진정한 본래 면목이 무엇입니까? 부처가 무엇입니까?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는 이 꽃이 하나 놓여 있어요. 이게 동양란인가요? 이것을 보고 여러분들이 도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단 말이에요. 그러면 동양란을 가리킨단 말이죠. 이것은 지금 색이죠. 모양과 빛깔을 지닌 색 모양이에요. 모양인데 스승은 동양란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요. 뜰 앞에 잔나무다 이렇게 설명을 한단 말이에요. 뜰 앞에 제자가 스승에게 법이 무엇입니까? 물었는데 그때 그 뜰 앞에 서서 물었었겠죠.
그런데 그때 뜰 앞에 잔나무가 있었단 말이에요. 여기 이렇게 동양란이 있듯이. 가리켜 보인단 말이에요. 이게 직지인심입니다. 곧바로 자기의 마음을 가리켜 보인다. 이 마음이라는 게 법, 불성, 자성, 본래면목, 주인공, 공, 공성하는 이 진실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법을 가리켜 보인단 말이에요. 자기 마음을 가리켜 보인단 말이에요.
동양란 하고 뜰 앞에 있는 잔나무야, 이렇게 들어 보일 수도 있고 이 색을 들어 보인단 말이에요. 공을 물어보는데 진실이 무엇인지 물어보는데 색을 들어 보인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들은 이걸 딱 보고서는 우리의 분별심에는 이게 색으로 보인단 말이에요. 분별된 대상으로 보인단 말이죠. 그러니까 헷갈리, 혼돈이 오는 겁니다. 꽉 막히는 겁니다.
불교의 언어
나는 분명히 진리가 무엇인지를 물었는데 저 스님은 왜 물질을 가리키고 있지? 왜 색을 가리키고 있지?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뜰 앞에 잔나무다 그랬더니 제자가 발끈하면서 스승에게 다시 묻습니다. 스님, 저는 지금 이 물질, 색 이걸 물어본 게 아닙니다. 사물을 물어본 게 아닙니다. 스님, 사물을 가지고 저에게 답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건 사물이고 색인데 색을 들어 보여서 보이면 되겠습니까? 저는 지금 공을 물어본 겁니다. 진리를 물어본 겁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가리켜 보여주십시오 이랬단 말이에요. 뜰 앞에 잔나무다 이랬더니 뜰 앞에 있는 잔나무, 저 사물 말고 법을 보여주십시오라고 다시 물어요. 그랬더니 스승이 얘기합니다. 좋다. 너의 뜻이 그렇다면 내가 색이 아닌 법을 가리켜 보여주겠다. 네가 나에게 다시 한번 물어봐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제자가 똑같이 물어요. 스승님, 법이 무엇입니까? 나, 저의 본래면목이 무엇입니까? 똑같이 질문을 한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스승이 조금 전과 똑같이 대답을 합니다. 뜰 앞에 잔나무다. 그때 깨달았어요. 이 제자가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게 되게 유명한 선에서의 일화예요. 처음에는 뜰 앞에 잔나무다라고 했을 때 색을 보여주는 줄 알고 이걸 딱 보여줬을 때 처음에는 색을 본 거예요.
색과 직해서 함께 있는 공을 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긴 여러분, 여러분 지금 색이 보이시죠? 동양란이라는 색이 보이시죠? 제가 이렇게 손가락을 드는 이 색이 보인단 말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이거 교리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교리로 들으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제가 색을 들어 보이지만 곧바로 공을 들어 보이는 거예요.
이거 제가 지금 색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공이에요. 이게 법이에요. 이게 본래면목이에요. 진정한 자기의 본래 면목이 이거란 말이죠. 이것이 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색을 가리킬 때 동시에 법을 자기의 본래면목을 마음을 이 살아있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법을 드러내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오랜 습관 때문에 몇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분별의 눈으로써 분별된 대상만을 바라봤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