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을 둘로 나누어서 보는 나와 보이는 것을 둘로 나누고 듣는 나와 들리는 것을 둘로 나누고 나와 세계를 둘로 나누어서 분별된 대상만을 보던 것이 우리는 습관이 돼 있어서 이렇게 법을 들어 보일 때 직진심 할 때 여기서 견성성부를 못한단 말이죠. 여러분 이렇게 들어 보일 때 이게 물질인 것 같잖아요. 색인 것 같잖아요.
색을 들어 보이는 것 같은데 이거란 말이죠. 이게 공을 확인시키고 있단 말이에요. 여기에 색 말고 확인되는 게 있어요. 새가 아닌 법이 확인되고 있단 말이에요.
색과 법의 확인
이럴 때 지금 여러분들의 표정처럼 이게 법입니다라고 스승은 선의, 스승들은 조사 스님들께서는 끊임없이 설명을 해요. 마삼근이다. 뜰 앞에 잔나무다. 뭐 호떡이다, 차나 한잔해라, 아니면 법이 무엇입니까? 묻는데 이렇게 법을 들어 보이기도 하고요. 법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그 스님 옷에 이렇게 끄나풀이 하나가 이렇게 붙어 있어요. 이거를 이렇게 떼가지고 후 불어서 법을 보여줘요. 스승이 법을 보여줄 때는 모든 것이 법 아닌 게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제 법문을 듣다가 스님 이렇게 죽비를 딱딱 치거나 손가락을 꽝꽝 두들기거나 이게 법이다 하고 이것이 법입니다 하고 이렇게 가리켜보이고 죽비를 딱딱 치면서 이게 법이다 하고 가리켜 보이는 걸 좀 많이 해주십시오. 그게 바로 세계공인 착한 그 도리를 설하는 것이니까, 그럴 때마다 내가 집중이 탁탁 돼가지고 그러다 한 번 내가 그냥 쑥 내려가겠죠?
그러니까 설명하는 법문도 좋지만 곧바로 가리켜보이는 직진심을 자주 좀 해주십시오.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이 계신단 말이에요. 법당을 처음 들어올 때 제가 법회를 하려고 이렇게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올 때 또 저 뒤에서 이렇게 삼배를 할 때 이렇게 걸어와서 이 의자에 앉을 때, 법회 시작하기 전에 책을 이렇게 넘길 때 목을 하고 가다듬을 때 차를 한 잔 마실 때 그리고 우리 피디님이 저는 시작합니다 하고 할 때 제가 말로 설명한 어떤 말이든 색불이공을 설했던 공불이색을 설했던 조사 스님의 이야기를 설했던 어떤 말, 어떤 행동, 어떤 움직임 수많아 들이쉬고 내쉬는 그 모든 것 속에 직진심 아닌 것이 있느냐는 말이죠.
곧장 법을 드러내보이지 않은 것이 있느냐는 말이죠. 이 법을 써서 말하고 행동하고 숨 쉬고, 여러분도 이 법을 써서 자기가 곧바로 법이기 때문에 배고픈 줄 아는 거예요. 목마른 줄 아는 거예요. 목마를 때 그냥 문득 목말라요. 그럼 가서 물을 마십니다.
그리고 색이 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겉에서 몸뚱이가 이렇게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있는 이것만 보면 이건 색이죠. 근데 무엇이 그렇게 나를 목마르게 하고 목마를 때 무엇이 이렇게 이렇게 가서 물을 마시게 하죠. 무엇이 자기를 이렇게 살아있게 합니까. 무엇이 이 송리를 듣게 하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여기 있는 이것을 말고 이것을 떠나서 따로 여기 이면에 어디 딴 곳에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어떤 신이라든지, 어떤 원리라든지 무언가가 따로 있겠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색 즉시공이 아니죠. 색 있는 그 자리에 곧바로 공이 드러나 있다고 했잖아요. 그냥 이거란 말이에요. 다른 걸 틈이 없단 말이죠. 머리 굴릴 틈이 없단 말이에요. 100% 가 드러났단 말이죠. 100% 색이 드러났고 공이 드러났단 말이죠.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
이것을 그래서 선에서 어떤 비유를 많이 하느냐면요. 이렇게 설명을 해요. 안경을 제가 쓰고 있죠. 안경 너머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안경 너머로 이것을 보고 있죠. 안경 너머로 책을 보고 있습니다. 안경 너머로 이 꽃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안경을 쓰신 분들은 안경을 쓰고서 세상을 다 봤단 말이에요.
꽃도 보고 책도 보고 컵도 보고 사람들도 보고 다 봤단 말이죠. 그런데 집에 가서 뭘 봤지? 오늘 뭘 봤지라고 사람들이 물어보면 우린 전부 다 뭘 봤다 그래요? 아 난 컵도 봤고 상도 선언도 봤고 부처님도 챙겨냈고 책도 봤고 꽃도 봤다. 이렇게 말하겠죠. 그렇죠? 왜냐하면 우리는 이 안경알을 통해서 안경알과 측해서 안경알을 통해서만 이 세상 모든 것을 봤잖아요.
그런데 안경알에는 한 번도 관심 가졌지 않았던 거예요. 안경알을 먼저 이게 먼저잖아요. 첫 번째 자리에 먼저 있단 말이에요. 이 안경알이 먼저 확인되고, 그다음에 이걸 통해서 컵도 보고 책도 보고 꽃도 본단 말이죠. 그런데 이 안경알은 너무 익숙해서 너무나 당연해서 한 번도 여기에 관심 가져본 적이 없는 거예요. 안경알 너머에 바깥만 보고 다녔던 거죠. 그래서 이것을 한 번 돌이켜라,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회광반조해라.
돌이켜서 여기 있는 이거를 먼저 확인해라, 이런 식의 표현을 쓴단 말이죠. 유리창의 비유를 들어서 유리창 너머에 있는 모양만 보다가 눈앞에 항상 있던 유리창, 이런 식의 비유예요. 이런 식의 비유를 자기 본래면목을 설명할 때 하기도 하고요. 또 거울의 비유를 들어요. 우리의 마음 본래면목, 이 공이라는 이 마음 본래면목의 이 자리를 옛 거울 고경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거든요. 본래부터 있던 거울이라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세상을 보잖아요. 소리를 듣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도 알아차리고 어떤 걸 생각하죠. 그렇죠. 무엇이든 인식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보자마자 컵이다 하고 인식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이건 보자마자 컵이다, 이게 사실은 인식되지 않죠.
컵을 인식하기 이전에 '컵이야' 이러면 벌써 분별이잖아요. 왜냐하면 분별이라는 건 뭐냐면 태어나서 새롭게 배운 거예요. 배워 익힌 거예요. 다른 것과 비교해서 이해될 수 있는 어떤 언어를 가지고 언어를 개입시켜서 배운. 거죠. 즉, 태어나자마자 여러분 갓난아기였을 때, 태어나자마자 이걸 보고 컵이라고 안 했겠죠.
그런데 우리가 명과 상으로, 즉 명은 이름 명칭이고요. 상은 모양이에요. 이런 모양을 지닌 것은 우리가 명 어떤 명칭, 컵이라는 명칭으로 이름 붙이자 했단 말이에요. 명과 상이 개입된 거예요, 벌써. 명과 상이 개입되어서 컵 이렇게 했단 말이에요. 명과 상을 개입한 것을 분별의 대상이라고 불러요. 분별된 것 이렇게 불러요. 이걸 컵이라고 할 때는 벌써 분별심이죠. 분별한 마음으로 컵 이렇게 한 거잖아요. 갓난아기는 이걸 분별할 줄 모르니까 컵이라고 못 할 거예요.
그런데 갓난아기가 눈앞에 이걸 갖다 대면, 컵인지 뭔지는 몰라도 먼저 이걸 아는 마음은 있겠죠. 즉, 갓난아기에게도 거울과도 같은 마음이 있겠죠. 거울은 이게 컵인지 뭔지는 몰라도 거울 앞에 이게 오면 이걸 그대로 비추잖아요. 거울은. 이게 예를 들어 똥이라고 치면, 거울 앞에 똥을 이렇게 갖다 대면, 거울은 이 똥을 그대로 비출 거예요. 분별하지 않을 때는 아름다운 것이 오나 똥이 오나, 그저 비출 뿐. 그게 있다는 사실, 그저 알 뿐이죠.
갓난아기들처럼. 그냥 똥이 오든 컵이 오든 맛있는 음식이 오든, 그냥 비출 뿐이에요. 갓난아기는 똥이라고 해서 싫어하지도 않겠죠. 그냥 만지겠죠. 좋은 것도 그냥 만지겠죠. 분별이 없으니까. 이것처럼 우리에게는 분별하기 이전에 우리는 분별심만 쓰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진짜 분별심만 쓰고 살았냔 말이에요.
분별심을 쓰기 이전에, 분별심이 아니라 무분별심, 그게 먼저 있었지 않았나요. 첫 번째 자리에서 이걸 컵이라고, 명과 상으로, 명과 색으로 이름 붙이기. 이전에 이게 눈앞에 딱 등장했을 때 이걸 먼저 알지 않나요? 이걸 먼저 비추는 그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비추고 있잖아요. 이걸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없어요. 이거를 비추고 있단 말이에요. 이게 먼저죠. 그 다음에 분별해서 이걸 컵이야, 이런단 말이에요.
비교와 분별
어떤 사람을 딱 봤어요. 보자마자 아, 저 사람 이름이 뭐야. 저 사람은 남자고, 아 저 사람 인물이 좋다. 그거는 다 분별이죠. 분별은 비교해야지만 알 수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을 딱 보자마자 크다 이랬다면, 그건 분별이죠. 남들과 비교했을 때 누구보다 크다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작을 수도 있잖아요. 분별은 진짜가 아닐 확률이 있어요.
남자다 여자다 하려고 해도 여자가 있어야 남자라는 게 분별이 되잖아요. 못났다라고 하려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야지만 그 사람이 잘난 지 못난 지가 분별되잖아요. 즉,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자마자 곧장 분별해서 알죠. 그런데 분별하기 이전에 분별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그 거울과 같은 마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죠. 그래서 이 본래 있는 마음. 이 본래 있는 마음은 갈고닦아야지만 이 거울처럼 비추는 마음은 여러분, 분별하는 거는 공부해서 배워야 되잖아요.
여러분, 이건 알지만 어떤 엄청 어려운 과학적 용어라든지 어떤 도구라든지 그런 걸 갖다 놓으면 우린 뭔지 모를 거 아니에요. 안 배웠으니까 모를 거 아니에요? 분별이 거기까지는 못 미치는 거죠. 그러니까 분별은, 분별해서 아는 거는 공부 많이 한 사람은 많이 알겠죠, 공부 적게 한 사람은 조금 알겠죠? 그러니까 차별이 돼요. 분별지예요.
많이 하는 사람, 적게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열심히 하는 사람만이 더 많이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이 그냥 비추는 무분별심, 무분별지 그냥 비추는 이 마음은 갈고 닦아야 될까요? 배워야 될까요? 배워야 하지만 더 뚜렷하고 배우지 않으면 뚜렷하지 않을까요? 갓난아이에게 있는 이 무분별지와 우리에게 있는 무분별지가 똑같지 않을까요?
공부 많이 한 교수님들, 박사학위 몇 개를 가지고 있는 교수님들과 우리가 분별지는 다른데, 분별지는 그분이 훨씬 높죠. 그런데 이 첫 번째 자리에 있는 이 무분별지, 이 반야지혜 이 무분별지를 거울과도 같이 비추는 마음을 반야지혜라고 불러요. 이 반야지혜는 갈고닦아야 하는 것이 아니죠.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져 있죠. 이건 대평등심이에요. 차별되지 않아요.
부처님에게 있는 이 거울과도 같은 마음과 우리에게 있는 마음이 다르지 않죠 없습니까? 여러분 이 무분별지가 없습니까? 이렇게 거울처럼 비추죠. 이렇게 이 소리 못 듣는 사람 있나요? 이 소리를 듣자마자 스님이 법당에서 손으로 책상을 내려치고 계시구나 하고 분별해야지만 아냐는 말이에요. 분별하지 않아도 갓난아기도 옆에서 이러면 이게 뭔 소리인지 분별은 못해도 이걸 그냥 비춘다. 그래서 비춘다. 그러는 거예요. 이걸 그냥 비추어서 아는 이 첫 번째 자리에 암이 있단 말이에요.
이 마음 없는 사람 있습니까? 이게 뭐 그렇게 어려운 겁니까? 이 거울과도 같은 마음 누구에게나 본래 구족되어 있단 말이에요. 이 마음은 대평등심 모두에게 똑같단 말이에요. 저 구석에서 조용히 책을 보고 있는 저 아이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단 말이에요. 그리고 깨달아야만 이걸 쓸 수 있나요? 깨달아야만 부처의 마음을 불성을 쓰고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지금 이렇게 불성을 쓰고 있죠. 불성과 늘 함께 있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이 거울과도 같은 불성이 여기에 곧바로 있지 않나요? 색 즉시공 아닙니까? 색 있는 여기에 곧바로 공이 있지 않나요? 그래서 이것을 옛 거울, 거울과도 같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요. 또 이것을 바다와 파도의 비율을 들기도 해요.
파도가 파도는 모양이 다 다르잖아요. 큰 파도 있고 작은 파도가 있어요. 그래서 작은 파도는 큰 파도를 부러워할 수도 있겠죠. 파도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 다르잖아요. 능력이 다 다르고 개성이 다 다르고 재력이 다 다르고 다 다를 거 아니겠어요? 우리는 파도와 같단 말이에요. 분별된 대상들은 전부 다 파도와 같아요.
파도의 특징은 그냥 바다예요. 바다 뿐이에요. 파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바다뿐이에요. 그런데 인연 따라 바람이 확 불어버리면 파도가 갑자기 커지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는 잔잔해져요. 즉 인연 따라 파도는 거세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해요. 그런데 파도의 본질은 바다일 뿐이잖아요.
바다잖아요. 근데 파도가 나라고 여길 땐 어떻겠어요? 파도를 나라고 여길 때는 나는 큰 파도가 되고 싶어. 나는 아름다운 파도가 되고 싶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파도가 거세든 작든 물질이 이 물질이든 이 물질이든 이 물질이든, 이건 전부 다 파도가 아니라 파도는 모양 따라갔을 때 파도잖아요. 근데 모양 따라가지 않고 모양의 본래면목, 본질. 파도의 본질은 바다잖아요. 물결의 본질은 물이잖아요. 그럼 파도는 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파도는 파도인 채로 그대로 물이에요. 파도가 곧 물이란 말이에요.
이게 색즉시공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파도를 자기로 착각하고 살아온 거예요. 파도가 이렇게 치니까 이게 난 줄 알고 이렇게 치는 파도를 보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이 몸뚱이, 색, 수상행식, 느낌, 생각, 의지, 의식 전부 다 파도예요. 파도 진짜 내가 아니라 나의 본질은 몸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색수상행식이 아니에요. 이 색수상행식은 파도처럼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질 뿐이에요.
인연 따라 여러분이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니까 살아있잖아요. 호흡, 공기를 싹 빼버리면 나는 그냥 죽는 거예요. 파도가 올라왔다가 파도가 꺼지듯이, 그럼 파도가 올라왔을 때, 파도가 꺼졌을 때 다 바다잖아요. 그러면 바다 입장에서는 파도 입장에서는 생, 멸치 있잖아요. 생겨난 게 있고 멸한 게 있잖아요.
인연 따라 생, 인연 따라 멸하잖아요. 근데 바다 입장에서는 본래 입장에서는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졌을 뿐이지. 그거는 생겨난 것도 아니고 사라진 것도 아니에요. 바다 입장에서는 그냥 언제나 바다였을 뿐이지. 불생, 불멸이에요. 생도 없고 멸도 없습니다. 바다에서는 인연 따라 치는 파도처럼 이 몸과 마음, 느낌, 여러분 생각, 의지, 의식, 느낌, 감정 전부 다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 따라 사라지잖아요. 누가 칭찬하면 기뻤다가 비난 들으면 갑자기 괴로워지잖아요.
그거 진짜가 아니잖아요. 방금 전에 분명히 내가 욕먹고 괴로웠는데 조금 있다가 누가 나를 너무 칭찬해 줄 때 갑자기, 조금 전에 있던 그 괴로움은 사라지고 너무 행복해진단 말이에요. 그럼 조금 전에 있던 그 괴롭던 마음은 어디 갔어요? 지금 다시 행복해졌단 말이죠? 이게 파도 같지 않나요? 감정 진짜 있는 거예요? 인연 따라오고 가잖아요, 생각 진짜 있는 겁니까? 인연 따라오고 가잖아요. 몸, 마음, 느낌, 의지, 의식 전부 다 인연 따라오고 갈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