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자기는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에요. 몸 안에 있는지 바깥에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색깔도 모르겠고 크기도 모르겠고 이렇게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그걸 몰라요. 우리가 이 진짜 자기는 몸은 잘났는지 못났는지 뭐 몸매가 좋은지 안 좋은지를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것도 진짜가 아니죠. 비교해서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에요.
몸과 마음의 이해
아 나는 지금 나라고 여기면서 여태까지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 나로 여김 몸은 아니구나. 몸은 재행무상이니까 계속 바뀌니까. 그런데 몸을 나라고 여기면 일체괴고란 말이에요. 몸이 자꾸 늙어가니까, 몸이 아파가니까 괴롭단 말이에요. 몸을 나라고 여길 때 괴로워요. 그래서 항상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제행무상은 일체괴고다 이런단 말이에요. 그리고 무상하고 괴롭다면 거기 고정된 자아가 없다 이런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이 희한하네 나아가 없네, 몸에도 몸에 나아가 없네. 몸에 나라고 할 만한 걸 찾을 수 없네라고 느껴진단 말이에요.
그러면 아, 마음이 나겠지? 그럼 아, 이 몸이 내가 아니라 뭔가 이 몸을 끌고 다니는 마음이라는 게 따로 있을 거야. 그래서 우리는 예를 들어 영혼 같은 존재를 상정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말했냐면, 우리가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수상행식이다. 그랬어요. 그러면 수, 느낌이에요? 상 어떤 표상작용인데, 생각 이런 거예요. 감성적이고 이성적인 작용이에요.
우리에는 보통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 있고 이성이 앞서는 사람이 있죠. 이게 두 가지 마음에 두 가지 기본 데이터에요. 그러면 느낌 감정이 나인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봐도, 느낌은 왔다 가잖아요? 내가 기분 좋은 느낌이 있을 때가 있고, 기분 나쁜 느낌이 있을 때가 있어요. 우울할 때가 있고 기쁠 때가 있어요. 그 느낌은 왔다가 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느낌이 갔을 때 나도 갑니까?
느낌이 없어지면 나도 없어져야 되잖아요? 아까 몸이 나면 10대 때 몸이 갔으면 나도 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난 여기 이대로 있잖아요. 그것처럼 나는 우울해. 난 우울증 걸렸어. 난 우울한 사람이야 이랬는데, 우울증이 가고 멀쩡해졌는데도 나는 여기 그대로 있어요. 우울함은 왔다 가는 거였단 말이에요.
감정 느낌 이건 왔다 가는 거였어요. 그런데 어떤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그 느낌이 있는 줄 아는 자기는 여기 늘 있단 말이에요. 왔다 가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예를 들어 불성인이 진짜 부처 진연이 여연이 열애여건 이렇게 불러요. 부처님의 성품 이 부분을 열애라고 부처님을 열애라고 부르잖아요.
열애는 열애여거에 준 말이거든요. 여유하게 오고 여유하게 간다는 것은 한결같아서 오거나 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진짜 열애라는 거예요. 즉 자기에게서 지금 여기 자기에게서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거 열애여거인 부처인 성품 부처인 측면이 나에게 분명히 있더라는 거예요. 몸은 왔다 가지만 왔다 가지 않는 게 여기 있단 말이에요.
감정은 왔다 가잖아요.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감정이 왔다 갔어요? 왔다 가지 않는 게 여기서 그 감정을 알고 있고 느끼고 있어요. 여기서 그 모든 걸 자각하고 있단 말이에요. 비추고 있단 말이에요. 그 감정을.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걸 비춘다는 표현을 써요. 거울이 세상을 비추듯이 그냥 이렇게 비추어 본다. 이 비춘다는 건 몸도 비춰보는 거예요. 모양도 비춰볼 뿐 아니라 소리도 비춘다. 그래요. 소리도 비추고 냄새도 비추고 맛도 비추고 감각도 비추고 생각도 비춘다. 이 비춘다는 말의 의미를 아시겠어요? 본다, 듣는다, 냄새 맡는다, 맛본다, 감정 느낀다, 생각한다.
이거는 육감이 다른 것 같잖아요. 근데 이게 하나란 말이에요. 하나의 비춤이 작용하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의 비춤이 눈으로 가면 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귀로 가면 듣는 작용을 일으킨단 말이에요. 이게 이제. 선사 스님들은 항상 그랬거든요. 이 하나의 법이 마음이 눈에선 보고 귀에선 듣고 발로 가면 걸어가고 손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런다고 표현을 했단 말이에요. 근데 이게 요즘에 과학에서 그렇게 얘기해요. 과학에서 요즘에 공감각이라고 해서 음악을 듣는데 그 음악은 무슨 색깔 같아 이렇게 색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감정과 감각
두 가지 감각을 동시에 느끼거나 이 감각을 저쪽 감각으로 이렇게 표현하거나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근데 그게 옛날에는 예술가들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에게만 그런 게 있는 줄 알았는데 일반인들도 다 그 공감각적인 능력이 있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 냄새 맡는다는 건 이게 우리는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다는 얘기를 과학자들이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 TV를 봤더니 유명한 과학자가 나와서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본다거나 듣는다거나 하는 게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은 같은 작용이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과학에서도 거기까지를 알게 됐나 보죠. 선사 스님들이 옛날부터 많이 그랬어요. 또 시인들도 그런 표현을 쓰죠 그죠. 제가 아는 옛날에도 잘 알던 어떤 법원님도 그런 식의 표현을 종종 썼어요. 이 두 가지를 같이 쓰는 거예요. 되게 독특한 시적인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정말 그래요. 장엄한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뭔가 음악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옛날부터 선사 스님들은 눈으로 듣는다, 귀로 본다 이런 말을 쓰기도 했어요. 그리고 내가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보고 있다. 세상 전체가 다 눈 같다. 내가 우물을 보는 게 아니라 우물이 나를 본다 이런 표현을 썼어요.
여러분 꿈을 꾸잖아요. 눈으로 본다고 느끼지만, 꿈을 꿀 때도 봤죠. 꿈속에서도 소리를 듣죠. 꿈속에서 길을 걷고, 냄새 맡고 맛보고, 생각도 하고. 꿈속에서 모든 걸 다 하잖아요. 그런데 꿈속에서 눈으로 봤을까요? 귀로 들었을까요?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했을까요? 아닌데도 꿈속에서 무언가가 꿈의 의식 하나가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맛보기도 하고 다 하잖아요. 그러지 않나요? 그런단 말이에요. 이처럼, 이렇게, 이 하나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하는 거예요.
다시 돌아가세요. 이렇게 느낌을 왔다 가는 거예요. 느낌 왔을 때 오는 줄 알고, 갔을 때 가는 줄 아는 이 느낌을 비추는 이곳은 늘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생긴 지 모르겠어요,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오거나 가는 게 아니니까, 모양이 있는 게 아니니까, 상이 있는 게 아니에요. 모양이 없어요. 뭐 있다거나 없다고 할 수가 없단 말이에요.
이것을,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중도라고 설하신 거예요. 이것을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게 중도의 가르침이에요. 그럼 부처님은 내가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열반, 해탈을 말씀하셨죠. 내가 없는데 도대체 뭐가 열반하고 뭐가 해탈할 거예요. 열반과 해탈, 이것을 설명하셨단 말이에요.
자아탐색
이거를 그냥 선불교에서는 열반, 해탈, 이것을 무아, 무아를 선불교에서는 그냥 진하라고 표현했던 것뿐이에요.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이렇게 말해요. 마음이라고도 표현하고, 이 똑같은 마음을 무심히 표현하고, 무심이라고도 표현해요. 선불교에서 무심, 마음이 없다. 이렇게 표현할 때는 그게 마음을 얘기하는 거예요. 마음은 있다 커니 없다 커니 할 수 없는 거예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무심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이제 여하튼 그래서 느낌도 왔다 가는 거에요.거예요. 생각도 마찬가지죠. 생각 우리는 바뀌잖아요, 계속 바뀌잖아요. 생각이 이 생각 왔다 가고 저 생각 왔다 가요. 근데 여기서 이 생각을 하고 있고 저 생각을 하고 있는 그 자기는 늘 여기 있단 말이에요. 생각은 계속 왔다 가서 생각을 가지고 나라고 할 수 없어요. 그 생각을 가지고 나라고 하면 생각 바뀌면 나는 다른 사람인가요?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서 내가 바뀌었다고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생각은 왔다 가는 거예요.
의지, 바람, 욕구, 욕망 다 마찬가지죠. 옛날에는 이런 욕구가 있다가 지금은 다른 욕구가 있을 수 있어요. 옛날에는 다른 의지를 가지고 있다가 지금은 또 다른 의지를 가지고 있을 수 있어요. 의지작용은 계속 바뀌잖아요. 애들 때부터 뭐 하고 싶어 하면 계속 바뀌잖아요. 어른도 마찬가지예요. 의지가 계속 바뀌어요. 바람, 욕망, 인연 따라 계속 바뀌어요. 어떤 특정한 의지를 자기라고 할 수 없어요. 심지어 내성적인 사람이 외향적으로 바뀌기도 해요. 외향적인 사람이 내성적으로 바뀌기도 하고. 어떤 특정한 의지를 자기라고 할 수 없어요. 그 의지는 왔다 가는 것뿐이지.
의식도 마찬가지죠. 분별의식 내가 아는 마음 있잖아요. 세상은 이런 거야 저런 거야라고 아는 마음 그 마음 바뀌어요. 우리가 최종적으로 대상을 아는 마음이라고 하는 그 식, 의식, 인식 계속 바뀝니다.
나는 너무 못난 사람이야 하고 되게 우울증에 막 시달리고 괴롭고 자존감이 뚝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아는 이런 친구가 있거든요. 예술적 기질이 뛰어난 친구였어요. 근데 예술적 기질이 뛰어난 사람들 중에 되게 독특한 사람들이 많아요.
예술적 기질이 뛰어난 사람들의 특징은, 우리 애니어그램 같은 거 공부해 보면 4번 기질이 있는 사람들은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대신 자기만의 독특한 것들을 좋아해요. 남들과 똑같은 거 싫어해요, 회귀된 걸 싫어해요 못 버텨요.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자기는 정말 독특한 어떤 삶을 이렇게 보거든요. 이런 사람은 같이 어울리고 이런 걸 되게 못해요,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공동체 생활을 못해서 막 왕따가 되기도 해요.
그런 친구가 있었어요, 어디도 적응 못하던 친구가. 그런데, 그 친구를 보니까 너무 독특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냥 똑딱 그림을 그려주는데 제 얼굴을, '이게 스님이에요?' 이러고 똑딱 그려주는데 깜짝 놀랐어요, '뭐지 이 친구?' 그 공동체 속에서는 완전히 이렇게 왕따 같은 친구였는데 너무 예술적 기질이 뛰어난 거예요. 그런 친구가 나중에 그쪽 분야에서 상당히 잘 되거나 이럴 수 있단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떠냐면, 어릴 때는 내가 자존감이 뚝 떨어졌는데 어떤 인연 따라 자존감이 확 올라갈 수도 있죠. 자존감이 확 올라가자 자식 만만해질 수도 있어요, 이렇게 성격도 바뀌어요,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어요. 나는 못난 사람이라고 인식하다가 자기에 대한 인식이 어느 날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인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세상은 괴로운 곳이야 이랬다가 세상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야 이런 인식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자기 분별이 계속 바뀐단 말이에요.
이렇게 몸도, 내가 아니고 느낌, 생각, 의지, 의식, 음식 행식이 전부 다 진짜 자기가 아니었단 말이에요. 이거 말고 있습니까? 내가 나라고 여기는 거. 이거 말고 또 있나요? 다른 게 있나요? 이걸 가지고, 우린 나라고 여겼단 말이에요. 근데 이것이 하나하나 해체해서 보니까 내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 여기 지금 나다라고 여기면서 지금까지 살았는데 몸도 내가 아니고,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이 내가 아니에요. 그건 왔다 가는 것뿐이에요.
그럼 여러분은 지금 있으니까 없습니까? 있긴 있어요. 근데 그게 몸은 아니에요. 내 성격도 아니에요. 느낌도 아니에요. 생각도 아니에요. 가치관도 아니에요. 의식도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무언가 이런 것도 아니에요. 나의 알맹이가 없단 말이에요. 나의 알맹이가 없어요. 우리는 나의 정체성 이래 가지고 자기 정체성을 딱 하나 세워놓고 있잖아요.
화두의 성립과 수행법
난 성격 좋은 사람이야. 난 외모가 이런 사람이야. 나는 어느 대학을 나왔고 이런 식으로 자기의 이미지를 그려놓고 그걸 자기라고 취했는데 그게 전부 다 자기가 아니었어요. 진짜 자기가 없고, 내가 이미지로 붙잡은 것 색수상행식들을 막 취해 가지고 오추연이라고 해서 이 다섯 가지를 취해서 그 가운데 유력한 것을 나라고 취했던 거예요. 그 모양, 이미지를 취한 거예요. 색수상행식을 내가 내식대로 모양으로 취해 가지고 그게 나라고 만든 걸 보고 아상이라고 불러요.
나라는 모양, 나라는 이미지라는 거죠. 그게 진짜 있는 줄 안단 말이에요. 근데 그건 상이 었을 뿐이에요. 그 상은 허상이에요, 허상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었단 말이에요. 오추연에서 취해 가지고 상을 만든 거니까 실상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그러면 지금 여기 이것도 실상이 아니에요. 나라고 여기는 것 어디에도 실상이 없어요. 진짜가 없어요, 무화예요, 무화 내가 없단 말이에요. 근데 내가 없는데 내가 없네요. 오케이, 내가 없습니다. 그럴 수 있어요? 정말 자신만만하게 내가 없다고 할 수 있냐는 말이에요. 내가 없다고 하려니까 나는 무화를 증득했습니다. 내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돼요? 옆에 가서 '너 무화야? 너 없어?' 알았어, 한 대 때리든지 그 사람 가지고 있는 통장을 달라고 하든지, 통장 도장을 달라고 하든지, 그럼 주겠냐는 말이에요. 안 줘요, 자기가 있단 말이에요. 때리면 아픈 이놈이 있단 말이에요. 근데 이 아픈 게 몸이 아픈 게 아니었어요. 몸이 나면 몸이 아프면 내가 진짜 아파야 되잖아요. 몸이 아프면 내가 진짜 아플까요? 몸이 아픈데도 나는 전혀 안 아플 수 있어요.
하도를 뜰 때, 하도를 줄 때 몸이 이렇게,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이놈이 누구냐. 손을 이렇게 들고 내리고 하는 이놈이 누군지를 찾아라. 내가 보고,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계속 끌고 다니고 이 송장을 끌고 다니고 있는데 이게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뭐가 이걸 끌고 다니게 하느냐. 그 주인공이 누구냐. 그걸 한번 찾아봐라. 이런단 말이에요.
근데 머리로는 찾으면 안 된다. 머리로 헤아려서는 찾을 수 없다. 이것은 분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분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알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알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딱 하도를 준단 말이에요. 이거 누가 하느냐. 이 손가락이 튕기는 거 누가 하느냐. 손가락 이거 누가 하느냐. 주먹을 쥐고 펴고 이거 뭐가 하는 거냐. 이놈을 찾아라. 송장 끌고 다니는 그놈이 누구냐. 이걸 찾아라. 이런단 말이에요
그런데 조건 이게 이제 가나선에 하도를 주는 거예요. 하도를.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거 지금 누가 하느냐. 이걸 찾아라.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가나선에서 어떤 조건이냐. 머리로는 안 된다. 헤아려서 알려고 하면 안 된다. 이건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배워온 건 아는 거거든요. 분별해서 아는 거거든요, 근데 세상의 방식이 아니에요.
이건 출세관이라서 세관에서 지금까지 배웠던 방식으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하던 방식은 정말 내려놔라 불가능하다. 그걸로는 분별로는 불가능하다 알 수 없다. 그런데 찾아라,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길을 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방법 없다, 방법 없다 그런단 말이에요. 하도에서 이게 누가 이거 하는지를 찾아라 했단 말이에요. 혹은 뜰 앞에 잔나무 이렇게 한마디 던졌어요.
제가 뜰 앞에 잔나무를 했단 말이에요. 뜰 앞에 잔나무, 이게 뭐냐. 뜰 앞에 잔나무, 이게 법이다. 이게 진리다. 이게 진짜 자기 벌레 면목이다. 그런데 뜰 뒤가 아니라 뜰 앞쪽에 있는 소나무가 아니라 잔나무 그거 아니다 그 모양이 아니다. 그냥 뜰 앞에 잔나무 이거다. 근데 그 모양은 아니다. 뜰 앞에 잔나무 이거잖아요. 이걸 누가 이렇게 하고 있느냐.
이걸 확인해라. 이걸 찾아라. 그런데 방법 없다. 방법은 없다. 연부를 백만 번만 하면 그 답이 나오나요? 그럼 연부를 하면 되겠죠. 연부를 백만번 한다고 답이 안 나와요. 찾아라. 그런데 방법 없다. 머리로 해하려서도 안 된다. 애써도 안 된다. 노력해도 안 된다. 그러면 어떡할 거예요? 답은 내야 되겠는데, 머리를 못 쓰는 거예요. 방법도 없어요.
그럼 어떻게 되냐면 저절로 확 막히죠. 답답하죠, 까깝하죠, 막막하죠. 답은 찾아야 되겠고, 간절히 찾고 싶은데 또 스승이 옆에서 자꾸 불러가지고 알겠냐, 모르겠냐 자꾸 묻는단 말이야. 매일같이 찾아서 묻는단 말이야. 매일같이 법문해 주면서 아직도 모르겠느냐. 이렇게 두뇌에서 어디다 쓰겠느냐 하면서 때로는 막 혼돈했다가. 그러니까 뭔가 막 간절히 알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답답하면 꽉. 막히는 거예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거예요. 한 발도 어디 못 가는 사람처럼,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정신적인 감옥에 딱 갇힌단 말이에요. 은산 철벽에 딱 갇혀있는 것 같다고 그래요. 쇳불 속에 이렇게 들어가는 뿔이 있잖아요? 쇳불 안에다가 쥐 덫을 놓는단 말이에요. 쥐 먹을 걸 쥐가 이렇게 들어간단 말이에요.
이걸 먹고 싶어서 앞으로 더 돌아가면 몸이 더 끼고 빠질려니까 이걸 못 먹고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빠지지도 못하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꽉 막힌 상황 그걸 화두가 들린 상황이라 그래요. 화두가 들렸다 의단동록, 화두가 딱 성성하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그런데 이 화두 수행법은 초기 조사선에서부터 비롯된 거예요. 초기 조사선은 뭐냐, 초기의 육조, 임제, 조주, 마주, 황벽 이런 조사스님들. 그 스님들은 내 스스로 화두를 혼자 탑하는 게 아니라 법문을 계속 들려주는 거에요. 누구냐, 오운, 계공, 몸. 그 너 아니다 몸 왔다 가는 게 어떻게 너일 수 있느냐. 느낌, 생각, 의지, 의식. 그 너 아니다. 근데 분명히 그렇다고 네가 없느냐. 내가 하는 말 듣고 있지 않느냐. 그 누가 듣느냐. 보고 있지 않느냐. 그 누가 보느냐. 보고 나서 '컵이다'라고 하는 건 분별이 하는 거다.
두 번째 자리 떨어진 분별이 하는 거고 이 소리를 듣고 손으로 꿍꿍 두드리는 소리구나 하고 분별하는 거는 분별이 하는 거라 두 번째 자리 떨어진 거다. 분별이 하는 걸 두 번째 자리 떨어졌다래요. 그런데 두 번째 자리 떨어지기 전에 분별 아닌 알림이 있단 말이에요. 경험이 있단 말이에요. 작용이 있단 말이에요.
이걸 첫 번째 자리 '무분별'이라고 불러요. 이걸 반야심경에서 '반야지혜'라고 불러요. 이 '반야지혜'는 분별지가 아니라 무분별 지입니다. 분별에선 알 수 없는 거예요. 대상을 아는 지식으로는 알 수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색 즉시공, 공 즉시색. 색이 있는 거기에 곧바로 공이 있단 말이에요. 곧바로 진실이 드러나 있단 말이에요. 따로 찾으면 안 돼요.
그냥 이거예요. 그냥 이거 찾는 게 바로 이거란 말이에요. 내가 차지할 것이 그런데 우리는 이거 하면 바로 이 얘기를 듣자마자 분별한다고 생각하고 해석해서 이걸 분별로 알아들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 생각 빼면, 그 생각 빼면, 그냥 언제나 이거란 말이에요. 무엇을 하든 뜰 앞에 잔나무라고 하든 뭐, 뭐, 뭐 호떡이라고 하든 방구를 끼든 국어 사전 첫 번째 글자에서부터 끝에 글자 어떤 글자를 말을 하든 말을 안 하든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늘 이게 한단 말이에요. 이게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단 말이에요.
이 법이 한단 말이에요. 법이, 법이 자기를 그러니까 자기가 늘 이걸로 지금 살고 있는 거에요. 이걸로 보고, 이걸로 듣고, 이걸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자기 살림살이라고 불러요. 살림살이 살림살이 없으면 밥 해 먹고살지 못하잖아요. 이익이 없으면, 이 마음이 없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어요. 우리는 이 자기 부처, 자기 불성, 이 마음 무심 이걸 써서 이렇게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부처가 돼야 됩니까? 아니면 단 한순간도 부처가 아닌 적이 없나요? 단 한순간도 부처가 아닌 적이 없어요. 이런 이 진실한 측면, 이걸 열반 해탈, 적정, 고요함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이게 진짜 산매예요. 진짜 선정이고 이 선정은 왔다 가는 게 아니에요. 물결은 왔다 갔다 하지만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단 말이에요.
이게 진짜 선정이에요. 생겨나고 사라지는 선정은 왔다 가는. 선정이잖아요. 언제나 이 자기의 본래 성품. 이 자리는 늘 고요하단 말이에요. 이게 본래 선정이고 여기서 나오는 지혜가 본래 지혜예요. 분별해서 나오는 지혜가 아닌 여기서 무한정 우리는 이렇게 늘 작용하고 쓰고 있단 말이에요. 무한히 쓰고 있단 말이에요.
무한한 어떤 지혜작용이 완전히 드러나 있단 말이죠. 이거를 찾는 거예요. 이거를 확인하고 나면 아, 오원이라는 것이 공하는구나, 진짜 내가 아니구나. 나는 정말 무하인 것이구나. 이 잇따르고 여긴 이것은 그냥 인연 따라오고 가는 것일 뿐이었구나. 무상하고 무하인 것이구나.
그래서 이제 이런 대목이 나와요. 경전에서는 색 몸은 거품 덩어리와 같고 수는 거품 방울과 같고 상은 신기루와 같고 행은 바나나 줄기 같고 식은 허깨비 같은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아주 유명한 니까야 아함경 같은 부처님 가르침에 아주 많이 나오는 가르침이 요거예요. 오원이 삼법인은 무상고 무하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얘기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물질 색은 영원합니까 무상한 것인가 하고 부처님이 물었어요. 그랬더니 무상한 것입니다.
몸뚱이는 색은 항상 하지 않으니까 무상하게 변해가는 거니까. 이 세상에는 모든 색이 다 무상하잖아요. 항상하지 않잖아요. 그랬더니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하고 울어요. 그랬더니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다면 그것은 행복인가 아닙니다. 고통입니다. 이게 무상고 무하를 얘기하는 거죠. 삼법인을 설하시는 겁니다. 고통입니다 했어요. 그러면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것들에 대해서 무상하고 괴로운 것 이것에 대해서 이것은 나다 나의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은가, 옳지 않습니다.
몸에 대해서 무상하니까 무상한 건 괴롭잖아요. 무상하고 괴로우면 그걸 가지고 나라고 할 수 있느냐. 이건 계속해서 무상하게 변해가는데 여기 집착하면 내가 괴로운 건데 집착할 일이 없다. 계속 변해가는 거니까, 변해가는 것을 어떻게 나라고 할 수 있느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건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라는 거죠.
그다음에 느낌도 똑같이 물어봐요.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은 영원한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건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롭습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것들에 대해 이것은 나다 나의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은가, 옳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무상한 줄 알기 때문에 잘 배운 거룩한 제자들은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느낌에 집착하지 않으며, 생각, 의도, 의식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원에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욕망에서 벗어난다. 욕망에서 벗어남을 통해 해탈을 얻는다. 이 욕망에서 벗어나면 집착하지 않아서 몸에도 마음에도 나라는데 집착하지 않으면 해탈을 얻는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해탈이란 말이에요. 나는 이 몸과 마음에 구속되어 있는 그런 제한된 존재가 아니구나. 그럼 어떤 거에도 집착하지 않아요. 나 이 몸에 집착하지 않아요. 내 것에 집착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늙고 병들고 죽는 거에 집착하겠습니까. 이게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무하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괴로워할 이유가 있겠느냐는 말이에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아요.
치유 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 내가 없구나, 내가 실제 하지 않는 거구나. 그러면 살 필요도 없지. 그럼 자살이나 할까? 열심히 살 필요도 없고, 돈 벌 필요도 없고, 자식 키울 필요도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 없네. 다 아무것도 없는 건데 이거 뭐 하려 해. 이렇게 공허감에 치유 친 편공, 공에 치유친단 말이에요. 공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생긴단 말이에요. 그래서 공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해서 중도를 설했단 말이에요.
공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색 즉시 공이지만, 공 즉시 색이다. 즉, 색이 공인데 거기서 끝나버리면 공에 사로잡힌단 말이에요. 집착한단 말이에요. 치유친 공이 된단 말이에요. 다시 살려줘야 돼요. 죽였다가 다시 살려야 된단 말이에요. 이걸 살왈짜재 줬다 뺏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머무는 법 없이 마음을 내도록 집착 없이. 그러나, 마음을 내도록 집착은 없으나, 현실을 자유자재로 열정을 가지고 삶을 창조적으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게 부처님 가르침이에요. 완전 공허감에 빠져가지고, 그냥 쓰러져 있으라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이게 바로 중도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없으나, 내가 없는 가운데, 이제 자유롭게 늙고 병들고 죽는 거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단 말이에요. 괴롬에서 벗어나는 지혜가 생긴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