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이비설신의 무 색상 위촉법 이걸 이제 우리는 12처라고 불러요. 우리가 옛날에 제가 고등학교 때 12초 공부할 때 기억이 나요? 어쩌라고 이랬던 느낌이 나요? 오늘은 12절 공부하는 시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비 소식은 색상이 위축법. 눈으로는 보고, 뭐 색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듣고 이런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래서 그래서 뭐, 그래서 뭐, 어쩌라는 부처님? 왜 그 얘기를 하셨는데? 그게 우리 괴로움 해결하고 뭔 상관이 있는데 이걸 설명을 해줘야 되는데 그냥 이 얘기만 해놓으니까 부처님 왜 저희가 했을까 이게 이제 궁금했던 이제 그런 기억이 납니다.
12 연기 이해
우리가 육 근 6경 이렇게 배웠을 거예요. 눈 깊고 혐오 뜻. 우리가 나라는 이 존재가 세상과 세상과 마주하는 세상과 만나는 길이 있어요, 문이 있어요. 그게 눈으로는 세상에는 모든 색 경을 본단 말이에요. 안근 눈으로는 색경이라고 하는 색 모양 물질과 모양과 빛깔이 있는 색을 보다. 눈으로는 그리고 귀로는 이 근 이근이 성경을 마주한다.
그래서 귀로는 소리를 듣는다. 세상에 소리를 접촉하죠 듣죠. 그리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맛을 보고 몸으로는 이제 첫. 경이라고 해서 감촉을 느끼고, 또 뜻으로는 생각으로는 오만 생각을 다 하죠. 그러지 않은 입이 훨씬 의라고 합니다. 이 여섯 가지를 가지고 내가 세상과 만나는 거예요. 내가 세상을 만날 때는 항상 6가지 육 근이라고 하는 이 감각 기관, 혹은 감각 기능, 감각 활동, 감각하느니이 활동. 이것을 이제 육 근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아마 이런 말 들어보셨을 거예요. 그 스님들이 기도하고 축원해 줄 때 신도님들께 축원해 줄 때 항상 육근청정 이런 말이 나와요. 그래서 육 근은 청정하고 많이 나와요. 즉, 육 근은 청정해야 되는 거예요. 눈 깊고 혐오 뜻이 청정해야 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제 불교교를 공부하다 보면 12연기에서 보면 12 연기는 뭐냐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면함으로 이것이 멸한다. 이런 얘기예요. 그래서 12가지로 이게 있으므로 저기에 있었다 해서 이것이 있으므로 괴로움이 생겼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냐면, 이것을 소멸해야 이게 소멸되고, 문명이 소멸돼야 행위 소멸되고, 행위 소멸돼야 식이 소멸되고, 식이 소멸돼야 명색의 소멸되고, 명색이 소멸돼야 유기비 소멸되고, 점점 나아가 괴로움이 소멸된다.
이 소리거든요. 그 말은 12연기의 모든 지분은 소멸시켜야 된다는 거예요. 소멸시켜야 한다는 거예요. 무명 소멸해야 되죠. 행, 유위 조작하는 행위 소멸시켜야 되겠죠. 식, 허망한 망상의식 소멸시켜야 되겠죠. 명색을 소멸해야 된다.
명색은 쉽게 말해 이름과 모양으로 이루어진 모든 허망한 실제. 바깥에는 이것도 명색이잖아요. 이름과 모양을 '컵'이라는 이름의 '컵'이라는 모양을 지닌 것을 우리는 이 대상이라고 보잖아요. 이게 명색이거든요. 이 세상 전부 다 명세가 아닌 게. 없잖아요. 그러면 12 연기에서 명색을 소멸할 때 세상을 싹 다 부숴버리고 없애버리라는 얘기일까요? 그 말이 아니죠.
이 명색이라는 것은 이름과 모양을 자기가 분별심을 가지고 이것을 이름, 이것을 모양으로 지어서 이것의 실제에 다가가지 못하고 그걸 이름과 모양으로 허망하게 내가 취한단 말이에요.
예를 들어, 배고픈 사람이 샌드위치를 하나 먹는다. 그러면 샌드위치 하는 말과 명색, 이름과 모양이죠. 샌드위치하는 이름과 샌드위치의 어떤 그림이 그려져요 머릿속에. 그러면 배고플 때 샌드위치, 샌드위치, 샌드위치 한번 배가 불러지나요? 샌드위치라는 말과 명과 색 말과 모양은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 모양, 샌드위치 모양과 샌드위치라는 말은 실제 샌드위치가 아니죠. 샌드위치가 아니에요.
실제에 접근하기
세상은 없애버리라는게 아니라 그 허망한 명색으로 이름 짓고 개념 지어서 그걸 그것이라고 동일시하고 있던 그 생각 망상, 분별망상을 소멸시키라는 거죠. 똑같이 육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명색 유기 했을 때가 유기비. 바로 여기서 말한 육 근을 얘기해요.
그러면 어, 그러면 유입을 소멸시키라고 했잖아요. 여기서는 육근은 소멸시키라고 안 했어요. 육군은 청정하게 수호해야 한다고 했어요. 육군은 청정하게 수호해야 되는데 12 연기에서 보니까 6입을 소멸시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쩌라는 거야? 이거 청정하게 수호하라는 거야? 잘 지키라는 거야? 아니면 소멸시키라는 거야? 우리 헷갈릴 수가 있어요. 눈 깊고 혐오 뜻하고요 바깥에 색경 성경 향경 미경 축경 법경 색상의 미축법이라는 이것을 육 근과 육경이라고요. 감각기관, 감각 활동을 육 근이라고 하고 감각 대상을 6 경이라고 한다. 그랬어요.
이거는 없애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뭐를 없애라고 하는 거냐 하면, 내가 내 눈으로 세상을 보다 보니까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냐면, 이게 내 눈이네, 이게 나네. 그리고 바깥에 있는 건 내 바깥에는 세상이네. 바깥에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독자적으로 나와 별개로 내가 죽든 살든 세상은 진짜 있는 거 같잖아요.
내가 보든 안 보든,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보든 안 보든 63빌딩은 있잖아요. 명백하게 있잖아요. 그죠, 그게 망상이라는 거예요. 알 수 있어요, 100% 확신할 수 있습니까? 즉, 내가 볼 때 그것이 있는 거지, 나머지는 상상이죠. 상상을 있다 그렇게 치는 거예요.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하셨거든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일주일 있다 알았다고 괴로워 죽겠다고 어떻게 그랬어요? 외국에 연일 가서 핸드폰 탁 꺼놓고 일 회사에서 자꾸 연락이 와서 핸드폰 다 꺼놓고 간다고 선포를 하고서 핸드폰 다 꺼놓고 갔는데, 그때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때 나는 모처럼 여행이라 너무 즐겁게 놀았다는 거죠. 너무 행복했다는 거죠. 그분에게는 돌아가시지 않은 거예요. 내가 직접 보지 않았으니까, 듣지 않았으니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그분에게는 돌아가신게 그 현실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러다가 본인도 막 그냥 생을 마감했다 이러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실이 그분에게는 있었어요, 없었어요, 그와 같단 말이에요. 다 생각이에요. 생각 즉 보이는 대상이 독립적으로 실제 하는 게 아니에요. 보는 내가 있을 때가 보이는 대상이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볼 때 보이는 것이 있어야 보는 내가 있고, 보는 내가 있어요, 보이는 것이 있어요.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하고, 저것이 뭐라면 이것도 멸한다. 이 말은 뭐예요? 저것과 이것은 함께 공존하고 공생하는 관계라는 거죠. 그럼 저기 멸하면 이것도 뭐라고? 이게 말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건 뭐예요? 이게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거죠. 얘네 둘은 실제 둘이 아니라는 소리죠. 같이 생하고 같이 멸한다는 거잖아요.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아침에 세상을 누가 창조했고 언제 창조했을까요? 이러면 아 조물주가요. 수십억만 년 전에 조물주가 창조했을 거예요. 그런데 스님들은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예를 들면 그런 거예요. 아침에 눈 뜰 때, 그때 세계가 동시에 창조한다.
내가 명상을 하고 있어요,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있어요. 그때 세계가 있습니까? 내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다시 명상에서 딱 나와 버리면, 그때 눈을 뜨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가 동시에 연기한단 말이에요.
내가 10억을 벌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을 때는 그런 세상이 없어요. 근데 갑자기 내가 한 생각이 일으켜서, 내가 10억을 벌어야 된다는 생각에 집착하기 하는 순간 갑자기 나는 괴로운 거 같고 가난한 거 같고, 이런 현실이 연기하는 것처럼 내가 그걸 만들어 냈을 때, 그것과 동시에 이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주관과 객관은 동시생한단 말이에요. 동시별 둘이 아니에요. 결국 불이법이에요, 주객은 둘로 나눌 수가 없습니다.
현실과 인식 사이의 관계
그래서 12연기에서 여기서 무안이비설신의 무 색상이 미처 법이라고 한 것은 이런 게 본래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면, 연기적으로만 있을 뿐이다. 실제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는 연기적인 관계일. 뿐이다.
그 실재하는 독자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다. 내가 독자적으로 실재하지 않아요. 바깥 경계를 본다라는 이걸 통해서 내가 여기 있구나라고 그렇게 착각하는 것뿐이지. 이러다 보니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냐면, 내가 보고 내가 들으니까 보는 내가 여기 있지. 보이는 대상은 바깥에 실제 하지. 내가 안 봐도 그건 실제 하지. 우린 이렇게 생각해요, 100% 검증해 맞습니까? 내가 100% 검증될 수가 없잖아요.
그것은 근데 우리는 그 생각을 믿고 있어요. 내가 태어났어, 내가 지금 살고 있고 나는 죽을 거야, 그거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쉽게 말해서 태어나는 거 본 적 있어요? 여러분이 죽는 거를 경험해 봤습니까? 생각이잖아요. 내가 태어났을 거야, 그리고 지금 살고 있고 언젠간 죽을 거야 생각 아니에요.
10대 때 내가 아름다웠는데 생각 아닙니까? 그런 걸 지금 가져올 수 있어요, 그게 진짜 있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내 생각 속에서 그걸 그렇게 오해했을 수도 있어요. 그때 확, 그때는 내가 주인공이었어. 사람들이 다 나를 좋아하고 그랬어. 확신할 수 있습니까? 사실은 싫으실 수도 있어요. 내가 그렇게 상상했을 수도 있어요.
사람은 상상하기 시작하면요, 그 거짓된 상상을 진짜라고 믿게 하는 온갖 것들이 짝짝 짜맞춰 쉬어요. 자기가 생각으로 짜면 쳐버려요. 근데 놀랍게 뭐라나, 이게 착착 들어맞아요.
우리가 나는 태어났어 나는 살고 있어 난 언젠가 죽을 거야 이걸 믿고 있잖아요 나야 이게 나야 이 몸이 나야 이걸 믿고 있잖아요 그게 실제가 아닌데 진실에 아닌데. 나는 나로서 내가 아니라. 육 근은 육경이 있음으로써 육근이 있어요. 육근이 있으므로 육경이 있고, 나와 세계는 둘이 아니게 상호 의존적으로 연기적으로만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다가 우리는 이걸 나도 진짜고, 바깥에도 진짜야 보니까, 보는 내가 있지, 보이는 것이 있지 이렇게 믿는단 말이에요.
이거는 부처님의 통찰은 놀라운 거예요, 충격적인 거예요. 실제는 눈 겪고, 형험도 색상, 미처 법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는 거예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는, 연기적으로만 인연 가합으로 있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착각한단 말이에요. 보는 내가 여기 진짜 있어, 보는 자아가 여기 있어서, 그 자아가 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보이는 것이 진짜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저 사람이 옳다라고옳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옳은 사람이 저기 있구나 느끼잖아요. 모든 사람이 그걸 옳다고 느낄 줄 알아요. 내가 그렇게 봤으니까, 딴 사람은 그렇게 못 볼 수도 있어요. 나는 그 사람을 봤잖아요, 다른 사람들 다 볼까요? 아니에요, 나에게만 있어요. 분명히 봤는데도 못 봤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