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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의 불교적 해석 3편

by 과유과 2024. 7. 7.

명상을 할 때, 어떤 소리가 들릴 때, 지금 한번 잠시 눈을 감고 어떤 소리가 들리든 내가 저 소리를 듣는다라는 이미지, 개념, 생각을 하지 말고, 그 어떤 생각이나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그냥 이것을 경험해 보세요. 그냥 허용해 보세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들려오는 소리를 소리라고 개념 짓지도 말고, 무방비 상태로 그냥 그냥 황야에서 있는 나무가 바람이 불어서, 저절로 그냥 그냥 이렇게 떨리듯이 눈을 떠보세요.

 

명상의 중요성

우리가 분별을 해서 이 몸을 나라고 여기니까, 이 바깥은 내가 아닌 세상의 외부의 경계라고 느껴요. 눈길 거는 뜻은 나고, 색상을 미쳤고, 바깥이라고 느끼니까 그러니까 위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저 앞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어. 내가 분별을 빼 봐야지" 해 놓고 나서 딱 앉아요. 그러면 "저 앞에서 스님이 또 컴퓨터 들고 있네" 이 생각이 나는데. 아, 그 생각이 내려놓으세요. 그랬지. "아, 내가 듣는다는 생각도 내려놓자. 컵도 그럼 두드리는 소리도 내려놓자" 하고 탁 내려놨어요. 내려놓고 나니까 "저 앞에서 나는 소리 같아요". 그건 생각이 또 작동을 해서. "이게 나면 내 안에서 나야 되는데, 왜 저 앞에서 나는 거 같지". 그럼 분별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에요.

 

근데 이 소리와 다른. 저쪽에서 나는 소리가 날 때, 그건 또 저쪽에서 나는 거 같으니까. 어이, 소리는 앞에서 나고, 저건 저쪽에서 나네라고 하지만, 이 위치를 점하고 있는 나라는 걸 여기 기준으로 보면 여기서 났다, 저기서 났다.

 

그러지만 나라는 기준을 탁 내려놓으면 어떻겠어요? 이 텅 빈 허공성 안에서 이 소리, 저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그냥 들리고 있는데, 그 이곳저곳이라는 분별도 내려놔지고, 그냥, 그냥 이거죠. 아무런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그냥 이거란 말이에요. 지금 진짜 일어나는 일이 뭐냐 말이에요,

 

내가 있어요, 세계가 있습니까? 용기권이 한 번도 씻고 색상이 있습니까? 진짜는 뭐, 밖에 없어요. 이거밖에 없어요, 그냥 이것뿐이란 말이에요. 이것뿐이고 볼 때는 이렇게, 이렇게, 이것뿐이란 말이에요.

 

이 생각, 저 생각이 막 일어나지만, 일어나는 이 자리에 소리가 나온 자리, 돌아간 자리, 한 생각 일어난 자리, 되돌아간 자리. 그 당초로 돌아가 버리면, 그 모든 것이 나온 그 바탕, 장, 그 필드가 당처 자리에서는 다르지 않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냥 이게 진실이에요.

 

진실 뭐 진리 이런 말 필요 없고, 그냥 이게 경험되는 진짜잖아요. 우리가 명상하고 있을 때, 이게 진짜 듣는 나와 들리는 소리가 따로 있냔 말이에요. 그냥 이거 하나지 않나요? 한번 집에 가서 가만히, 한번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아무런 해석, 판단하지 않고 허용한 채 그냥 있어보세요.

 

소리에 대한 성찰

그럼, 이 소리가 따르고 듣는 내가 따로 있나요? 그냥 이것뿐이에요. 이게 이게 자기예요, 이게 진짜. 자기예요, 이게 진짜 지금의 진실이에요. 있는 건 오직 이거 하나뿐이에요. 불이법으로 그냥이 하나뿐. 이것뿐이에요. 눈개코 하면 뜻이 따로 없어요. 색상 미처 법이 따로 없어요.

 

버는 게 이거고, 듣는 게 이거예요. 생각하는 게 이거고, 느끼는 게 이거고. 사실은 보고 나서 분별하는 걸 따라가면, 보는 것 따르고, 듣는 것 따른데. 이걸 이제 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알아차림'이라는 표현을 써 볼게요. 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먼저죠. 갓난아기도 이건 알아차리고, 이것도 알아차리죠.

 

알아차리는 자리에서는 둘이 아니죠. 이게 따로 분별되지 않아요. 갓난 아기들은 분별을 하지 않고 그냥 본만 있잖아요. 본문에 대한 알아차림만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도 보고, 이것도 본단 말이에요. 분별없이 갓난아기에는 이것도 듣고, 이것도 듣는단 말이에요.

 

들음 요거 하나라면, 듣고 나서 '내가 들었어'가 아니라 '들음'을 통해서 듣고 있다는 알아차림이 있죠. 보물 통해서 보고 있다는 알아차림이 있죠. 이걸 좀 다른 또 다른 말로 표현을 한다면, 자꾸 '알아차림'이란 말에 또 속박될까 봐 쥐일까 봐. 여러분이 '나'라는 거는 살아 있는 게 나잖아요. 살아있는 진짜 자기 존재라는 어떤 생명 그 자체가 자기잖아요.

 

진짜 살아있는 생명, 자기 진짜 자기. 그걸 깨닫는 거잖아요. 그걸 확인하는 거잖아요. 진짜 살아있는 자기가 누구지 어떻게 확인하는 거죠. 보는 걸 통해서, 보는 걸 통해서 어 살아있네. 듣는 걸 통해서, 뭐랄까, 텅 비었다 그러잖아요. 불교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공적 이러잖아요. 공적 하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공적 한 거 같지가 않아요. 왜 '내가 없다'라잖아요. 내가 없다면서요.

 

불교에서 듣는 '나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면서요. 그런데 이게 없는 말이에요. 이걸 들리는 소리라고 분별하는 건 분별이잖아요. 분별을 빼고 듣는 나도 빼고 들리는 소리도 빼고 이건 명백하잖아. 이거는 그거 다 빼더라도 이거 하나는 알아차림이 보는 이 알아차림 이 알아차림 이거 명백하잖아요.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이 일어나는 걸 한 생각 일어나는 걸 통해서 그 생각을 보고 있잖아요. 이런 다라는 그걸 알아차리고 있잖아요. 그걸 통해 자기가 살아 있는 게 확인되잖아요. 이걸 통해서도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 있구나. 이게 자기를 확인시켜주고 있잖아요. 진짜 자기를 확인시켜주고 있잖아요.

 

진짜 자괴를 확인시켜주고 있고 그러니까, 저는 깨닫지 못했어요. 깨달고 싶어요. 저는 깨닫지 못했어요. 그게 자기를 확인시켜주고 있잖아요. 그 모양 개념 따라가지 않으면 깨달았어요 깨달았어요. 이 거는 분별이잖아요 깨달았어요. 이게 자기로 하기 시켜주고 못 깨달았어요. 이게 여기서 이 자기가 알아차려지는 거 아니에요.

 

지혜 알아차리기

자기 확인되는 거 아니야. 견문각지 하는 모든 곳에서 견 보고 문 듣고 각 깨닫고 가지 않은 모든 것들이 전부 진짜 자기를 확인시켜 준단 말이에요. 이렇게 안 입이 서신의 색상은 미적 법만 따라가면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만 살아왔죠.

 

맨날 평생을 내 눈이 저것을 봤어. 이건 좋은 거, 저건 나쁜 거, 이건 나에게 도움 되는 거, 저건 나에게 도움 안 되는 거, 이건 더 가져야 될까, 저건 버려야 될 것이 소리는 더 듣고 싶은 소리, 저 소리는 듣기 싫은 소리, 먹고 싶은 맛, 먹기 싫은 맛, 냄새 맡고 싶은 향기, 별로 안 좋은 향기, 만지고 싶은 거, 만지기 싫은 거, 뭐 탑승감, 뭐 무슨 이불에 감촉, 뭐 침대에 촉감, 이런 거, 이런 거 감촉 하나, 좋은 거 가지려고 자동차 막 억대. 자동차를 사잖아요.

 

좀 더 탑승감 좋은 그 느낌 하나 가지려고, 그렇게 좋은 느낌 갖고 싶은 집에 쇼파에 누워 있으면 억대 의자 하나 사면 되겠죠. 흔들리지도 않을 텐데 근데 그런 작은 그런 감촉 하나 더 어떤 취하고 싶어서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산단 말이죠. 근데 그게 진실 아니란 말이에요. 그게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러다 그렇게 취할 것들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버릴 것들이라는 말이죠.

 

근데 눈 깊고, 형한테 또 진짜고 이건 진짜 나고 색상 미처법도 진짜고 저건 진짜. 바깥에는 세상이야. 그리고 세상도 이것저것이 달라 이러면 내가 가져야 될 것 더 들어야 될 소리들 더 가져야 될 냄새의 맛 감촉 온갖 것들이 펼쳐진단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눈길 끊는 뜻으로 책상 위축법, 여기서 만들어낸 다음 시간에 배울게. 여기서 이제 의식이 생긴단 말이야.

 

분별 의식이 안식이식 비식서식 신식 의식이라는 게 생겨서 이 세상을 이제 시계 세계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창조해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만난 허망한 자기가 만든 자기가 만든 허망하게 만들어 놓은 창조한 세계를 진짜 세계라고 착각하고 살니까 그 속에 살니까 죽을 때까지 좋은 거는 취하는 인생, 죽을 때까지 싫은 건 버려야 되는 인생.

 

그걸 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잠시도 쉴 수 없고, 남들에게 뒤처질 수 없는 본래 엄마 구족이라는 걸 모르니까 부정불감이라는 걸 모르니까. 뭔가 자꾸 얻어야 되고 가져야 되고 취해야 되는 줄 안다는 말이에요. 더 좋은 걸 봐야 되는 줄 알아요. 더 좋은 걸 봐도 안 좋은 걸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거예요.

 

이 공부를 하고 나서 딱 자기를 확인하고 나서 뭐, 이런 식의 표현을 쓰기도 해요. 아, 내가 보는 건 해탈한 것. 같다 시간적으로 내가 해탈한 것 같다, 공간에서 내가 해탈한 것 같다. 이런 식의 말을 쓸 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시간이 눈앞으로 돌아온다는 말이에요. 공간이 옛날에는 어디 여행가서 막 좋은 곳에 있으면 마음이 열리는 것과 좋았지만, 이제는 거기 가나 여기 가나 다르지 않다는 말이에요. 사실은 봄에 당처 자리에 딱 있으면 본래 무안이 서신의 무색상 위쪽법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깨닫는다면 그럴 수가 없어요.

 

우리가 우리 본 마음을 이 자리를 본마음을 거울과 같다고 하잖아요. 거울은 그냥 빛을 뿐이잖아요. 알아차릴 뿐이잖아요. 이렇게 빛을 뿐이에요. 이거 비춤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어요. 아까 말한 알아차림이라고도 할 수 있고,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듯이 빛을 뿐이잖아요. 나쁜 걸 비추든 좋은 걸 비추든 똑같잖아요. 거울 입장에서는 근데 우리는 중생의 망상 분별을 가지고 취하며 산다니까,

 

좋은 걸 보면 좋아하고 싫은 걸 보고 나서 괴로워하고, 남들이 욕을 하면 괴로워하고 손을 폈어요, 접었어요, 폈어요, 접었어요. 뭐가 문제가 돼요? 근데 손을 폈다가 4개만 잡아 버리면 욕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화가 날 수도 있단 말이에요. 스님이 법당에서 욕을 했다 이럴 수도 있단 말이야, 그게 분별이 만든 거죠. 분별이 작은 거에 우리는 끌려다닌다니까, 이 작은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감촉을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에 다 일일이 끌려다니면서 분별하면서 살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본래 첫 번째 자리에 잊지 못했단 말이죠.

 

그래서 이 반야심경에서는 무안이 서신의 무색상 위쪽 법에서 이 12채가 본래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그래서 12채에 대한 네이처와 외입처를 소멸할 수 있도록, 그게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그건 다만 인연 따라 연기되었을 뿐인 뿐임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